무심워터월드

무심천 가상여행 출발

무심천 생태지도 보기

무심천 자전거도로란?

현재경로 정보

무심천명칭

4차메뉴모음

명칭

무심천이라는 명칭이 어디서 어떻게 유래되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지 알아봅니다.
무심천이라는 글자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무심천

'무심천'은 청주를 동과 서로 가르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무심천 서쪽 지역이 개발되기 전에는 청주를 에워싼 채 흘렀다. 양펑천, 월운천, 영운천, 명암천, 율량천, 발산천 등의 작은 내를 거느리고 있다. 무심천 동쪽에 우뚝 선 '우암산'과 함께 청주를 대표하는 자연물이다.

‘무심천’은 상당구 낭성면 추정리(머구미고개)와 가덕면 한계리, 내암리 일대에서 물줄기가 시작되어 청주를 동과 서로 가르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무심천 동쪽에 우뚝 선 '우암산'과 함께 청주를 대표하는 자연물이다. 그 물길은 시가지 중심부를 지나 미호천과 합류하고, 금강을 거쳐 서해에 이르는, 전체 길이 34.5km, 유역면적 177.71㎢의 지방하천이다.
현재 무심천 롤러스케이트장 근처에는 ‘무심천 유래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내용중에는 무심천이 통일신라시대에는 ‘남석천(南石川)’, 고려시대에는 ‘심천(沁川)’, 조선시대에는 ‘석교천(石橋川)’과 ‘대교천(大橋川)’, 일본강점기에는 ‘무성뚝’으로 불려왔다고 적혀 있다. 모든 이름이 정확한 고증에 의한 것들은 아닐 수 있겠지만 무심천이라는 하천의 이름이 ‘무심천’ 하나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이 중에서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현재의 무심천을 대교천(大橋川)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교천은 청주 고을 남쪽에 있는데 근원은 적현(赤峴)에서 나와 오근진(梧根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언급한 ‘대교’란 ‘큰 다리’란 뜻으로, 현재 육거리 시장 근처 땅속에 묻혀있는 남석교(南石橋)를 가리킨다. 이점으로 보아 구한말까지 무심천의 공식명칭은 ‘대교천’이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견해를 통째로 뒤집어 놓은 결정적 자료가 지난 1998년에 발견되었는데, 조선시대 고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던 '무심천' 지명이 느닷없이 옛 지도에 등장했던 것이다.

원향토사연구회가 지난 1998년 8월,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열린 영남대 소장 '한국의 옛 지도전'을 자세히 살피다가 호서전도(湖西全圖)중 청주목 지도에서 붓글씨로 깨알같이 표기된 '무심천(無心川)'을 드디어 찾아내게 된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가로 19cm, 세로 15.8cm 크기의 이 지도는 채색 필사본으로 작자는 알 수 없으나, 청주 읍성이 선명하고 산천, 행정구역 등을 표기해 놓았는데 운천동 북쪽 봉림숲(북숲)뒤편에 흐르는 냇물을 '무심천(無心川)'이라 적고 있다.

이로 보면 내의 이름이 일제 초기부터 '무심천' 으로 불리웠다는 통설과 달리, 적어도 2백년 이전부터 '무심천'으로 불리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이처럼 표기해 놓았으므로 어쩌면 수백년 전부터 '무심천'으로 불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대교천은 현재 꽃다리 일대에 해당되는데, 무심천 중심 물줄기와 금천동에서 내려오는 쇠내(金川)지류가 합쳐지는 꽃다리 일대를 대교천이라 부르고, 하류는 무심천으로 부르다가 구한말부터는 그냥 '무심천'으로 통용 한 듯 하다.
일제시대에는 무심천이라는 용어가 보편화되었고 여러 문헌에도 무심천이 등장한다. 1923년 일본인 오오꾸마 쇼지(大熊春峯)는 그의 저서 '청주 연혁지'에서도 무심천의 잦은 범람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무심천은 무심할 정도로 주변의 문전옥답을 순식간에 쓸고 지나가니, 하늘도 무심하다 하여 '무심천'이 됐다는 얘기가 있으나 뚜렷한 근거는 없다. 무심천 이름의 보다 직접적인 근거는 고려중기의 고승,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의 사상과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눌(知訥)에 이어 선종(禪宗)의 법맥을 이은 혜심은 한때 무심천변 사뇌사에서 여름 수련회격인 하안거(夏安居)를 하였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무심론자’였다는 점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무심이라 함은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게 하여 놓은 상태이지만 비우게 한다는 그 마음도 없애야 하며, 다시 나아가서 비우게 한다는 그 마음을 없애는 그것조차도 또한 없애야 한다. 그는 마음가짐에 있어 무엇보다 '무심' 을 중히 여긴 것이니 이 무심이야말로 참다운 마음이라 한다." <국사편찬위 간, 한국사 7권>

이처럼 무심천에 관한 이야기들은 다양하지만 청주 사람들의 가슴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변해가는 세상만사의 인심처럼 우리네 마음은 변하지만 고향은 옛 그대로인 무심천은 변함이 없네” 라는 시구처럼 변함 없는 무심천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봅시다.

  • 무심천과 관련된 대표적 명칭은 '대교천'과 '무심천'이다.
  • '대교천'은 무심천에 '대교'가 놓임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다. '대교'가 놓여진 시기가 불확실하여 '대교천'이라는 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없다. 19세기 말까지 쓰이다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 '무심천'이라는 명칭은 18세기 중엽의 옛 지도에 처음 보인다. 그 생성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교천'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0세기 이후에는 무심천에 대한 대표 명칭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는다.
  • '무심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아직 정설이 없다. 다만, '무심천'의 '무심'을 불교용어로 이해하려는 시각이 우세하다.
  • '심수' 및 '심천'도 오래 전부터 쓰여 온 명칭으로 추정되나 지식층에서 제한적으로 사용한 고급 어휘로 간주된다.

만족도조사